2026.01.07 오늘의 시
유진목 <21>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그는 어깨를 움직여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계속해서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가까스로 잎사귀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 그럴 때 함께 밤을 지샌 바다도 그랬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나중에는 돌아누울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자신을 건강하게 여겼다. 다시 한번 떠나기에 앞서 깊은숨을 쉬었다. 그는 잠자코 서서 바다의 종려나무에서 산의 종려나무로, 낮의 종려나무와 밤의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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