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6 오늘의 산문
김중혁 [미묘한 메모의 묘미] 中
화이트보드에 메모하기
소설의 시작은 언제나 화이트보드였다. 커다랗게 임시제목을 붙이고 한가운데 주인공 이름을 써넣으면 이야기가 시작됐다. 주인공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소설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화이트보드에 이름을 써넣었고, 주인공과의 관계가 바뀌면 위치를 옮겨 다시 썼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게 신기했다. 커다란 화이트보드는 작업실 한가운데서 큰 자리를 차지하며 소설 쓰는 내내 함께했다.
화이트보드는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다. 수첩이나 노트와는 사이즈가 다르다. 내가 애써 펼치지 않아도 화이트보드는 늘 나를 압박한다. ‘뭐 해, 빨리 이 세계로 들어와야지.’ 범인을 쫓는 형사들이나 거대한 한탕을 계획하는 범죄자들이 왜 화이트보드에 자료를 붙여 두는지 알겠다. 화이트보드에 하나씩 새로운 걸 추가하는 순간 그 세계는 현실과 점점 비슷해지고 나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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