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5 오늘의 산문
엄태주 [배움의 배신] - <예, 제가 바로 그 가방끈 긴 백수입니다> 中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했고, 사회가 궁금해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배웠고 논문을 써 학위도 취득했다. 하지만 그래서 뭐? So what?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들을 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로 남은 것은 달랑 논문 한 권, 그리고 어느새 야금야금 먹어버린 나이. 나머지는 오직 나만 알고 혼자 뿌듯한 경험이지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책을 사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물들어 한 점의 빛도 없이 어둑해졌다. 어둠이, 실제로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상당히 물리적인 존재임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런 날이면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가 밤이 이슥해져야 일어났다.
{중략}
그래도 겉으로는 잘 지냈다.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함께 그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가족도, 내 자신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행보를 내 주변 사람들은 기꺼이 응원하고 다독여 주었다. 가족보다는 먼 타인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힘든 시기에는 그런 적절한 거리감이 주는 신뢰와 은은하게 다가오는 다정함으로 버티기도 하는 것이다.
Don't miss what's next. Subscribe to 靈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