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6 오늘의 시
최정란 <딸기애인>
꼭지를 따고 센 불에 졸여요 설탕을 넣고
또 졸여요 형태가 으깨지고 뭉근해질 때까지
주걱으로 휘휘 젓다가 작은 돔처럼
기포가 동시다발로 부글거리며 끌탕이 시작되면
불을 낮추고 다시 저어요
타지 않도록
딸기를 보고 있으면 믿고 싶어져요
불편을 연료로 영혼을 헛되이 끓이는 나도
이따금 내 삶의 달콤한 적임자라고
울컥과 서러움의 적임자 같은, 나만 없으면
더 잘 돌아갈 세계를 의심치 않지만, 내가 없으면
따위 가정을 버리게 돼요
두려워요 망치게 될까 봐, 이 말도 잊어요
딸기 앞에서 두려울 게 뭐 있어요
태울 수도 있지요
알맞은 점도와 당도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게 뭐 어때서요
실수하든 망치든 살아있기만 하면
삶의 표면에 얇게 펴 바르는 데는 아무 지장 없어요
마음 졸이는 건 일상이잖아요
삼키다 목에 걸려 꺽꺽거리는 말들
뾰족하고 시고 차가운 덩어리들
끓이고 졸여
삼키기 쉬운 걸쭉한 잼으로 만들어 보아요
이 생에 다 못할 불가능한 복수 잠시 내려놓고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끝물 봄날을 뭉근히 끓여보기로 해요
달콤하고 끈적하게 입술이 쩍쩍 달라붙도록
그러니 약속해요
딸기밭 가기로, 다 늦은 이 봄이 가기 전에
어디든 좋아요
자, 새끼손가락 내밀어요 손가락 걸고
엄지도 내밀어요 도장 찍어요
한 입 깨문 봄의 붉은 몸에서 달게 흘러나오는
즙이 많은 목소리는
누구의 다정한 그늘일까요
Don't miss what's next. Subscribe to 靈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