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1 오늘의 시
나희덕 <지렁이를 향해>
소나기 지나고
햇빛 쏟아지는 오후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
길고 검붉은 몸,
어느 쪽이 머리이고 꼬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물기를 잃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말라가는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지렁이만은 아닌 듯도 해서
나는 지렁이를 가까운 숲 그늘로 옮겨주었다
막대기 끝에서 버둥거리던 지렁이는
흙으로 돌아가자 조금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렁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찰스 다윈은
지렁이의 몸이 어떻게 분변토를 쌓아 올리는지를 관찰하느라
그 가늘고 느린 몸을 따라다니며 몸을 숙였을 것이다
지렁이는 눈도 귀도 없지만
피부로 빛을 감지하고 진동을 느낀다는 것
잎사귀와 함께 진흙이나 돌을 즐겨 먹는다는 것
분변토 덕분에 식물이 싹을 틔울 수 있고
인간의 유물이 썩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
지렁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즉흥적 행위에서 지성을 읽어낸 것도 다윈이었다
지렁이를 향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사람
지렁이에게 빛과 어둠을 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마침내 땅속까지 따라간 사람
내가 숲 그늘을 쉽게 떠나지 못한 것은
지렁이 때문이 아니라
지렁이를 향해 다가가던 사람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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