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8 오늘의 소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中 -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나는 사 대째 내려오는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네. 어려서부터 하느님에 대한 말을 싫도록 들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섭리에 대해서도 귀가 아프게 들었지.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어. 그리고 그건 신에 대한 회의로까지 이어졌다네. 신학교 시절 내게 영혼 불멸에 대해 가르치셨던 루페르트 신부님은 평양의 교화소로 끌려간 뒤 칠 개월이나 설사에 시달리다가 중환자의 육신으로 세상을 떠나셨지. 그때 낡은 바지를 입힌 채 매장할 수는 없다고 해서 원장 신부님이 당신의 깨끗한 바지를 입혀드렸지. 나중에 평양이 수북된 이후 한국인 수사들이 교화소의 매장지를 파헤치며 시신들을 살펴봤을 때, 그 바지 덕분에 신부님을 금방 찾을 수 있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서 그 정도가 우리가 기뻐해야 할 몫이라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 영혼은 불멸하는가? 정말 그런가? 재가 되어버린 루페르트 신부님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내 신앙적 열정은 꺼져버렸어. 결국 나는 환속하고 말았네. 물론 환속의 이유에는 바르바라라는 더 깊은 고통이 숨어 있었지만.
하지만 이후 사십여 년에 걸친 공부를 통해 이성으로 신의 존재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네. 그래서 나는 신을 직접 체험한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에 관한 책을 읽었지.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바로 그 무렵, 나는 이십팔 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