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3 오늘의 시
황유원 <여몽환포영>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안전하지 않아도 된다
파도 소리의 저음에 경박한 호루라기 소리 섞어주며 우린 밤새
속초의 밤바다 잠들지 않게 했지
사실 난 죽을까 봐 좀 무서워서
그다음부턴 뛰어들지 않았고
너만 혼자 계속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아까 그 안전요원을 몇 번이나 빡치게 만들며
너는 침대에 몸이라도 누이듯 또 한 번 밤바다에 드러누웠지
그게 벌써 오륙 년 전 여름의 일이고
불을 끈다고 하루가 끝나는 건 아니어서
불을 끄면 기다렸다는 듯
밀려오는 물결들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파도의 포말처럼
기도가 새하얘져
해풍에 흔들리다 꺼져버리던 밤이 있었다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에 포함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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