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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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1, 2025

2025.05.11 오늘의 시

고명재 <오늘부터 우리는>

산책길을 걷는데 길이 좁아져 있었다
호박잎이 너무 자라서 길로 넘친 것
여름은 아름다운 침범이구나
사람들이 부푼 잎을 밟지 않으려
일렬로 길을 걸으며 웃기 시작했다

희망은 그런 좁은 길에서 급류를 타지
같이 걸으려면 팔짱을 꼭 껴야만 하네?
우리는 팔목을 잡고 여름아 고마워
그때부터 귓불에선 호박 탄내가 나고

피자를 집으면 삼각형 밖으로 치즈가 흐른다
이렇게 부드럽게 틀을 넘을 수 있다니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잘려 나가고
수채화를 그리면 턱선이 번지고
왜 자꾸 내 얼굴만 이러는 거야?
너무 살이 쩌서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다고

그러고 보니 청바지 밖으로 넘치고 있었다
일 년 전의 내가 나를 옥죄고 있었다
팽팽해지고 창창해지고 웃기는 잘 웃고
생일 폭죽처럼 한 번은 터질 것 같고

그러니까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서
정형시를 벗어난 시를 생각해
율격을 부수는 랍비와 죽비를 생각해
터진 둑이 댐과 번개와 백합과
단추를 펑펑 쏠 것 같은 몸집을 생각해

우리는 팝콘인가? 산사태인가?
산사에서 멀리 보이는 도시의 죽음인가
땀을 흘린다 여름에는 이마가 빛나지
땀을 흘린다 여름에는 존재가 넘치지
땀 흘린다 겨울이면 오, 춥지 않았네
허벅지가 적설처럼 두꺼워지는데

어묵탕 넘치고 탄산수 흐르고
뱃살이 겹치고
욕탕에서 웃음소리 탕탕 울리고
이 시는 사실 욕조에 앉아 혼자 쓰는 시
넘치는 물을 바라보다 넘실대는 시
미래는 엿보다 살이 통통 불어버렸네
오늘 있던 일을 계속 끌어안는 시

옆모습이 눈속으로 밀려들었다
오늘부터 우리는요 누군가 말했다
바로 그때 비가 막 부풀어 올랐어
니 뱃속엔 여름꽃과 망둥어가 있지!
얘들은 다 낳을 때까지 같이 걷자고
팔짱을 끼고 깍지를 끼고 둥글어져서
길을 꽉 채우는 호박 두 덩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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