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3 오늘의 시
구현우 <회색>
가까운 곳에서 연기가 난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건물들 사이로 더 아름다운 창문들 너머로 드러나는 사라지는 더욱더 아름다운 얼굴들, 사람이거나, 사람을 닮은 형상이거나
얼핏 보이는 유령들
연기 나는 곳에서 불이 났다는 얘기가 있고 누가 다쳤다는 말이 돌고 전염병처럼 번지는 불안 혹은 희열.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한때 연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무엇인가 큰일이 되어간다는 것만을 직감하면서
자주 가던 까페 아메리카노 씁쓸함이 목으로 넘어간다. 의미 없는 플래카드 문구를 기억한다. 태엽이 돌아가지 않던 오르골 소리를 듣는다. 까페에서
가끔 내가 있던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상상과 함께
연기의 원인을 짐작한다. 모르지만 발을 구르는 사람들과 알지만 입을 다무는 사람들 모두 한 무리가 된다. 하나의 장르가 된다. 모호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공유한다.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침묵이 유지되지 않는다.
불시에 피어나는 건 사랑과 증오만이 아니므로
추한 건물들 틈에서 연기가 멎지 않는다. 더 추한 그림자들이 연기속을 떠돈다. 더욱더 추한 비명들이
이곳에 울려퍼진다.
연기가 나지 않는 곳에서
연기가 나는 곳으로
내일의 약속장소를 변경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의 소란한 거리로.
연기에 파묻힌 이야기가 장황해진다. 거대해진다.
모든 말들이 비밀에 가가워진다.
하루가 지나고
연기 나는 곳은 그저 연기 나는 곳으로 불린다. 빠져나온 사람이 없다. 구조하는 사람이 없다.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유령들, 반은 아름답고 반은 추한 건물의 창문들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다.
안팎의 기준은 이제 연기다. 명확히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불확실한 감정에도 이름을 붙일 수는 있으므로
잘못된 일이 나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옹호하지 않는다.
연기는 명확하게 피어오르고
연기 바깥에는 읽을 수 없는 표정의 사람들
아무 이유도 없이 건물마다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밤과 낮이 선악 없이 섞이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