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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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6, 2025

2025.04.06 오늘의 시

김연덕 <여름장미>

던졌는데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공처럼 공의 공포처럼 잊히지 않는 밤이 있다 그것은 날이 밝으면 고개를 수그리고 물을 끓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창밖에 흐드러진 장미에 대해 말한다 어떤 죽음이 그렇듯 상담사가 그렇듯 그것은 주목받기도 주목받지 않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공이 있어 저마다의 여름밤 잃어버린 빛이 있어 몇몇은 주전자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사로잡히고 다정하게, 남 얘기처럼 밤은 작은 잔에 나누어 담긴다 저기요, 당신 언젠가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요 저기요, 말이 잘 통하네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흉내내며 한 시기가 지나간다고 느끼며 눈물을 닦으면 꼭 맞는 모서리에 기대는 기분이 들고 다각형이, 어른스러운 다각형이 되어 가는 것 같지만 실은 공기가 둥글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먹 쥔 손이 벌어지는 것이다 잠든 머리 위에 공이 하나씩 떠오른다 이상한 점선을 그리며 회전한다 물소리가 멎고 빛은 여기저기서 얼굴처럼 부풀어 오르고 마지막 잔이 채워지기 전 해가 진다 돌아오지 않는 건 돌아오지 않지만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공은 어디로 갔을까 나뭇가지를 부러트렸을 수도 누군가의 머리를 쳤을 수도 여전히 손 안에 있을 수도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공은 장미와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공은 다각형일 수도 있었다 부드러운 모서리의 장미는 시끄러워지자는 듯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돌이켜보자는 듯 끓어오르듯 핀다 그 안에도 공이 하나쯤 숨어 있을 것 같다 어떤 얼굴이 눈 뜨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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