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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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8, 2025

2025.03.18 오늘의 시

박소란 <갑자기 내린 비>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꺼내 펴는 것이다

조금도 놀라지 않고 허둥지둥하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등이나 어깨가 살짝 젖는 건 자연스럽고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지도가 하나 생겨날 때까지

모르는 골목

모르는 가로등이 탁한 눈을 끔벅이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너무 투명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씌워드릴게요,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왜 잊히지 않는지

왜 견딜 수 없는지

낯선 지도를 그만 찢어버리고,

찢어버리지 못하고

걸어가는 것이다

뒤돌아 달려가는 것이다

익숙한 빗속 익숙한 어둠 속으로

나는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창문을 닫아야 하는데 빨래를 걷어야 하는데

그리고

남은 일을 헤아리는 것이다

뭐가 더 있을까

뭐가 더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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