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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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 2025

2025.02.28 오늘의 시

안희연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 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 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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