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Subscribe
Archives
February 20, 2025

2025.02.20 오늘의 시

김은지 <종이 열쇠>

잘 구분된 이면지가 담긴 상자가

책상 한편에

고유한 느낌으로 있다

커피의 쓴맛 속에서 초콜릿과 견과류를 느낄 수 있게 되듯

이면지를 좀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경우에든 다시 쓰여도 괜찮은 허물없는 이면지

비밀을 갖고 있어 조심스러운 이면지

앞면이 너무 강렬해서 뒷면까지 채운 느낌인 경우는

손톱을 깎을 때 쓰기에 알맞다

뒤척이다가 일어나 아무렇게나 쓰는 꿈 묻은 말들

이면지는 잘 들어준다

이름을 봐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의 시를

이제 상자에 넣으려고 하는데

밝은 교실

어두운 창밖

사람들의 진지한 등

그 시를 읽었던 계절과 공간이

종이 한 장에 다

불려온다

Don't miss what's next. Subscribe to 靈雨:
Powered by Buttondown, the easiest way to start and grow your news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