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Subscribe
Archives
February 17, 2025

2025.02.17 오늘의 시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

 

​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 어떻게 해야 너를 웃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두 시간 동안의 폭우, 일주일 동안의 아침. 유리병 속 무한히 터지는 기포

 

​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홑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

 

네 손의 아이스크림과 내 손의 소다수는 맛이 다르다 너의 마음은 무성하고 청보리밭의 청보리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처럼 쉬워

 

무한히 터지는 기포

나는 너의 숨을 만져보고 싶다 ​

 

너는 머나먼 생각처럼 슬프거나 황홀한 곳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다 ​

이렇게 차가운 빛의 입자는 처음이야 아이스크림 속에도 휴양지가 있는 것 같아 매일 집에서 너를 보는데도 ​

 

놀랍지

세상에 없는 농담 같아 ​

 

마른 손 위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녹는

이상한 열매가 사랑이라면 ​

 

세상에서 가장 느린 목욕 시간

투명해지는 몸들이 자국을 가르치지 ​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나를 쓰다듬고 있어

생활이라는 건 감각일까 노력일까 ​

 

너와는 어디에서도 쉴 수 없어 미리 장소를 지워두었지 날씨를 오려두었지 향기만 남겨두었지 욕실용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어둠 속에 잠겨가고 우리는 우리의 미끄러운 윤곽을 읽는 데 몰두한다 ​

 

시간이 잼처럼 졸고 나는 불붙은 기억이 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숨

뼈와 살이 좁혀진다

Don't miss what's next. Subscribe to 靈雨:
Powered by Buttondown, the easiest way to start and grow your news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