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6 오늘의 시
하재연 <잘못된 음계>
그 여름에 시작되었습니다.
붉음이 우리를 덮었고
붉음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붉음은 아픔으로 불렸습니다.
붉음의 원인이 날씨일가
우산을 펼치면 나의 그림자가 잘려나갔습니다.
붉음은 우주로부터 온 것일까
겨울만 있는 나라들의 이름을 손꼽았습니다.
눈송이로 만든 알약이 혀 위에서 녹는 꿈에서 깨어나
흰 알약들을 삼키고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겨울에서도 나는 희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봄, 그리고 여름이 지나고
무수한 처방전들이 손바닥 위에 쌓이고
겨울은 우리의 행성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처방전을 복기하느라 잊은 단어들이 나의 몸속에서
먼지의 시체처럼 부스스 떨어져 쌓였습니다.
시체의 먼지들을 먹고 붉음은 더욱 붉어졌습니다.
당신의 원인이 당신인 것처럼
붉음이 너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당신은 사라져 주어야겠군요,
검은 옷으로 붉음을 가린 그들의 말 앞에
나의 붉음은 불타올랐습니다.
검은 재가 쌓인 땅 위로
우주로부터 전송된
하얗고 차가운 음표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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