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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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8, 2025

2025.02.07 오늘의 시

최지은 <우리들>

심야 버스였다. 내릴 곳을 몇 정거장 앞에 두고. 밝은 빛이 덤벼드는 검은 도로 위에 있었다. 우리들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냉장고에는 내가 오면 나누어 먹으려던 한 소쿠리의 무른 딸기. 잘자리에 과일을 먹어 어쩌니.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하고. 자꾸만 흐르는 과즙. 말없이 과일을 입에 물고서. 우리는 이불과 이불을 덧대어 잠자리를 만든다. 이불을 덧댄 자리에 서로 눕겠다며 조그맣게 같이 웃고. 이제 자야지. 그래 자야지 그만 자야지. 미루고 미루는 잠. 먼저 잠드는 사람이 있고 잠이 들려 하는 사람이 있고. 잠들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깨어 있기로 한다. 어금니에 낀 딸기씨를 혀끝으로 건드리면서 잠은 어떻게 드는 거였더라. 서로의 잠을 위해 잠자는 우리들. 눈 뜨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고. 나를 핥는 검은 개. 몇해 전 이 방에서 죽은 그 검은 개. 어쩐 일이야 물으면 작고 붉은 혀로 나를 핥으며. 혀는 더 부드러워져서 나는 이제 녹을 것만 같고. 아직 밖은 어두운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 나는 본다. 헝클어진 머리. 손을 뻗어 액자를 손에 쥐는 한 사람. 바라보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사진속의 나는 개를 안고서. 웃고 있었다. 여전히 개는 나를 핥고. 이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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