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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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2, 2025

2025.01.22 오늘의 시

고명재 <미더덕은 아름다움을 더 달라는 것처럼>

젖은 것들의 물주머니를 보고 있으면

당신을 데려간 물혹이라든가

개구리라든가

젖이 늘어진 어미 개라든가

비릿한 어촌에 걸어둔 청어의 눈 속에

부푸는 하늘 안쪽의 짙푸름이라든가

미더덕은 아름다움을 더 달라는 것처럼

헐떡대면서 좀더 살아볼 것처럼

부푼 몸으로 누운 채 검은 양말을 벗고

벌써 끝이 났다고 장례가 참 헛헛하다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고

나에게 삼년상을 허락해줬으면

조선시대의 물렁한 마음을 되돌려줬으면

그러면 홍시를 먹다가 씨앗을 물고

축축한 입속에 감나무 한 그루 불릴 수 있는데

당신이 심어둔 집 앞의 나무를 본다

당신이 묻힌 뒷산에 냉이가 번진다

더덕을 캔다 나무 방망이로 흰 다리를 찧는다 은행을 줍고 전어를 굽고 오징어를 썰다가 눈이 올 땐 달을 보며 군밤을 파먹는다

우리가 함께 입을 벌린 순간들

제철 음식을 한 번 되돌릴 시간을

미더덕은 아름다움을 터뜨릴 것처럼

한때의 바다를 손에 움켜쥔 채로

으드득 떨며 얇은 미닫이 문을 열면

구겨진 요 위에

폭발하는 수평선

복수(腹水)를 안고 뒤뚱뒤뚱 걷는 사람들

도토리 속엔 도토리 줄기가 푸르게 자라고

미더덕 속엔 짙푸른 고래가 웅크려 있고

내 머릿속엔 수류탄 같은 기억의 다발이 있어서

다디단 행복이 입속을 뒤집어놓을 때

노란 침으로 베개가 흠뻑 젖었다

당신을 떠올리면 세상이 좋아서

나는 기어코 풍선을 터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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