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1 오늘의 시
이혜미 <재의 골짜기>
서로를 헤집던 눈빛이 부서져 휘날릴 때 네가 선물한 골짜기에 누워 깊숙한 윤곽을 얻는다 먼 곳에서 그을음을 퍼다가 쏟아놓고 떠난 사람, 흉한 마음을 모아둔 유곡으로 들어서면 검은 꽃과 삭은 과일들이 가득했지
어스름을 뒤집어 여명을 꺼내면 가라앉는 골짜기마다 환한 어둠들이 차올랐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워 깨어져야만 안심이 되는 유리잔 같았지
가시덤불로 반지를 엮어 손가락에 나눠 끼우고 과분한 깊이를 선물 받았다 다정한 너를 오려내어 그 테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싶다 열쇠 구멍처럼, 비밀을 속삭이는 입 모양처럼, 뚫린 곳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어지러운 문양으로
이마에 역청을 묻혀가며 간신히 엮은 그림자는 한 생을 닳도록 입어야 하는 누추한 겉옷이 되었지 타다 남은 고백들로 이루어진 골짜기에서, 재 속에 눕는 것이 불 위를 뛰노는 것보다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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