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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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9, 2024

2024.12.29 오늘의 시

김경미 <거기 그 꽃이 있었다면 안 갔을 겁니다>

유도화 핀 마을엘 도착했습니다

유도화꽃 이렇게 많은 줄 모르고 도착했습니다

우표만 하던 여자의 밥알만 하던 의상실 구석

우물 같은 화분에 피어 있던 꽃

자주 박살나던 우표와 밥알과 우물

자주 두 발 치켜든 우물을 지켜만 보던 꽃

지켜만 보던

한밤중의 이웃집들 같던 꽃

이곳,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이곳에도

피는 줄 모르고

몇 시간이나 비행기와 배를 타고 무방비로

도착하고 보니 피었습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던 꽃

깨진 유리창에도 저만 무성하던 꽃

내가 차갑다면 그 꽃 때문이라고

꽃을 보며 이 편지를 씁니다

여기 꽃들은 같아도 다르리라

쇠보다 두껍고 고무처럼 말랑하리라고

절대 깨지지 않을 것처럼

깨져도 수박처럼 달콤하고 체리처럼 귀여우리라고

수평선보다 단단하고

박공지붕 밑 창문보다 뜨거울 거라고

모든 거울과 유리창이

깨지지 않는 고무이길 간절히 바라던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수십 년이나 걸려서

이렇게 멀리 왔으니

좀 봐주겠지요

무방비로 왔으니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울리지도

깨뜨리지도 않을 거라고

같지만 다른 꽃이라고

그때로부터 거리가 얼마이고 나이가 몇인데

그때로부터 무사히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죠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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